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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설교 이야기

부활 주일 교부 주해 - 누가복음 24:1-12, 요한복음 20:1-18

<부활 주일 교부 주해 - 누가복음 24:1-12>

24, 1 - 12 :
주간 첫날을 우리는 주일(주님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한데 첫째 날은 둘째 날로 이어지면서 사라지지요. 여드렛날이자 첫째 날인 그날은 영원을 나타냅니다. 처음에 우리의 첫 부모가 죄를 짓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전락함으로서 우리는 그날을 잃어버렸고, 부활 이후, 그러니까 우리의 마지막 원수 죽음이 파멸한 뒤(고전15,26 참조), 우리는 끝 날이자 여드렛날인 그날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고전15,53)'게 될 것입니다. 돌아온 [방탕한] 아들이 먼 고장에서 돼지를 치는 등 온갖 비참을 겪으며, 죽어야 하는 목숨의 수렁 속에서 세월의 수레바퀴가 일곱 번 도는 동안 고생하다가 여드렛날인 마지막 날에, 처음 입었던 겉옷을 다시 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득 우리 주님께서 첫째 날이자 여드렛날인 일요일을 택하여 몸소 육신의 부활을 본보기로 보여주신 것은 참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이상 그 분 이에 군림하지 못합니다(롬6,9).'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그 거룩한 여인들은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이 기록을 '그들은 밤중에 출발해서 일요일 새벽에 그곳에 도착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시신에 발라드릴 향유를 [토요일] 밤에 준비해서 이튿날 새벽, 무덤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마태는 간단하게 쓰느라 모호하게 기록했지만, 다른 복음사가들은(막16,1-2 참조) 이 일의 순서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금요일에 주님의 장례가 치러진 다음 여인들은 무덤을 떠나 노동이 허용된 시간동안 향료와 향유를 준비했지요. 그러고는 누가가 분명히 기록해놓았듯, 계명에 따라서(출12,16; 20,8-10 참조) 안식일 하루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이 끝나고 저녁이 되면 사람들은 다시 일을 해도 됩니다. 주님께 헌신적이었던 여인들이 주님 몸에 발라드리려고 [미처] 준비하지 못한 향료와 향유를 샀다고 마가복음사가는 알려줍니다(막16,1-2 참조). (존자 베다 '복음서 강해')
신비로 풀면, 무덤의 돌이 굴려진 것은 여태까지 율법의 문자들 아래 가려지고 닫혀있던 거룩한 성사들이 드러났음을 암시합니다. 율법은 돌 판에 새겨져 있었지요(참조 : 출24,12; 32,15; 34,1). 실로 우리가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때, 닫혀있던 그분의 무덤이 열리는 것입니다. (존자 베다 '복음서 강해')
천사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주님의 탄생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했었지요. 이제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알립니다. 하늘이 몸소 세상에 그분을 알리고, 그분께서 육신으로 계신데도 천상의 영들이 아드님을 하나님으로 모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누가복음 주해')
여자들은 무덤에 와서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는(그분께서는 부활하셨으므로) 것을 보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살아계시고 당신의 본성에 따라 생명이십니다. 하지만 스스로 몸을 낮추시어 자신을 비우고 우리처럼 되셨기에 죽음을 맛보셨지요. 그런데 그 죽음이 죽음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썩지 않는 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이 되시고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누가복음 주해')
제자들이 부활에 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아시겠지요? 복음사가는 이를 제대로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20,9)' 그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다른 일들, 곧 하늘나라와 그분의 승천 그리고 우리가 '첫 열매로 선택(살후2,13)' 된 사실에 대해서는 더욱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땅에 묶여 있어서 날아오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에, 그 나라가 예루살렘에서 그분에게 곧바로 임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한 복음사가는 그들이 그 나라를 인간의 왕국으로 생각했다고 일러줍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십자가와 죽음으로 가지 않고 당신나라로 들어가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마 일만번 같은 말을 들었더라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비유사파 반박')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면 당신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셔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많은 인간의 무리와 갈라놓고 악한 영들의 힘에서 자유롭게 하시고자, 죄 많은 인간들 손에 당신을 넘기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셨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당신을 위해 고통받는 덕과 부활하여 당신과 함께 살 희망을 주셨습니다.  (존자 베다 '복음서 강해')
여자들이 무덤에 와서 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대신 천사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자들은 그 사실을 남자들에게 알렸지요.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들었습니까?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헛소리처럼 여겼습니다. 인간이 이처럼 한심합니다! 하와가 뱀이 한 말을 전했을 때 우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거짓말하는 여인의 말을 믿어 우리 모두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살게 할 진실을 말하는 여자들을 남자인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면, 어째서 아담은 하와를 믿었던 걸까요? 여자들이 믿을 만한 존재라면, 어째서 제자들은 거룩한 여인들을 믿지 않은 것입니까? 그런즉 우리는 이 사실에서 주님의 훌륭한 뜻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당신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역할이 여자들에게 돌아간 ㅓㅅ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었습니다. 여성으로 인해 타락한 인류가 여성으로 인해 회복되었습니다. 한 처녀는 그리스도를 낳았고, 한 여자는 그 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선포했습니다. 한 여인을 통해 죽음이 왔고, 한 여인을 통해 삶이 왔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자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지요. 그들은 여자들이 헛소리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인데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이 희망, 이 선물, 이 약속, 이 놀라운 은총!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낙담했고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헛소리로 여겼지요. 진실이 헛소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 누가 부활소식을 선포한다면 헛소리로 여기고 다들 그 사람이 돌았다고 하지 않을까요? 다들 그 말을 싫어하여 귀를 틀어막고 못들은 척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이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우리는 싫어합니다. 어린양들이 무서워하는 병을 앞서 가는 숫양들이 앓았던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제자들의 불안과 의심이 우리 믿음의 기초가 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진리의 영께서 당신의 선포자들이 인간적 나약함으로 망설이게 두셨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한테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의심과 불안입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모습을 빌려, 사악한 자들의 중상모략과 세속 지혜가 증명하는 것들을 넘어서는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본 것'은 우리를 가르쳤고, 그들이 '만진 것'은 우리의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요일1,1-3 참조). 하나님의 계획과 거룩한 아버지들에게 불가피했던 '굼뜬 깨우침(눅24,25)'에 감사합시다. 그들이 의심했기에 우리가 의심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대 레오 '설교집')
주님께서 당신 옷을 무덤에 남겨두신 것은, 아담이 죄짓기 전처럼 알몸으로(창2,25 참조) 낙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옷을 입고 낙원을 떠나야 했던 그가 이제 [다시] 그리고 들어갈 때는 먼저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죽은 이들의 부활이라는 신비의 상징으로 옷을 남겨두신 것이겠지요. [주님께서] 옷을 입지 않으신 채로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옷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을 입고 [부활할]테니까요. (시리아인 에프렘 '타티아누스의 네 복음서 발췌 합본 주해')





<부활 주일 교부 주해 - 요한복음 20:1-18>

20, 1 - 18 :
주간 첫날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그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인간을 위해 태어나신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들과 함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 '거룩한 부활절에 관한 첫째 강해')
복음사가들은 무덤에 온 사람들과 그들이 온 순서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르게 기록하지만, 그들이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복음서가 일치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단편집')
'이른 아침'과 '밤 늦게'는 같은 때, 곧 한밤 중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리키는 시각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는 밤의 끝을, 다른 하나는 시작을 날의 시작으로 친 것이어서, 둘 다 밤의 한가운데, 방금 제가 말했듯이 한밤중이라는 같은 시각을 가리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복음 주해')
막달라 마리나는 만물의 창조주를 무덤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이 육체적으로 죽어 무덤에 묻힌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시신이 그곳에 없자, 그녀는 누가 그분을 훔쳐갔다고 생각합니다. 무덤에 왔을때, 마리아는 실로 아직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복음서 강해')
일부 그리스어 성경사본에는 '그들이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냥 시중드는 관계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남다른 사랑을 지닌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본에는 이렇게 표현된 것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그분을 전보다 못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분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예전처럼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름으로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복음 주해')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부활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들이 시신을 옮길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아마포로 시신을 감싸지도 않았을 것이며, 누가 시신을 훔쳐갔다면 수건을 걷어서 개킨 다음 아마포와 따로 두는 성가신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시신 채로 가져갔겠지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복음 강해')
아마포가 무덤 안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은 마리아의 생각처럼 누가 시신을 꺼내간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로 생각됩니다. 시신을 훔쳐가는 사람이 아마포를 남겨두었을리도 없고, 아마포를 다 풀때까지 그고세 남아있다가 잡힐 도둑도 없을테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마리누스의 질문에 관한 짧은 추보')
그녀는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곳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발견하지 못한 그분을 사방으로 찾았습니다. ...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의 힘은 더욱 열심히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만듭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그분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발견한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복음서 강해')
그곳에 나타난 천사들은 부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주제가 불거져 나옵니다. 그들은 먼저 마리앙게 다정히 말을 건넵니다. 유달리 환한 자신들 모습에 마리아가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하고 묻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복음 강해')그리스도를 위해 흘린 눈물은 언제나 보상받으며 그분에 대한 사랑은 머지않아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잘 보십시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복음 주해')
우리에게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성경의 이런 언명들은 구원자의 모습을 다시보게 되리라는 약속으로 우리 눈물을 닦아줍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복음서 강해')
그들이 알아보지 못한 잘못이 주님의 육체 탓이 아니라 그들의 눈에 닫혀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도록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눅24,31)'.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찾고있는 동안에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한 것이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그 뒤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았고, 그때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히에로니무스 '예루살렘의 요한 반박')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마리아를 일반적인 호칭을 써서 '여인아'라고 부르시고, 그 다음엔 '마리아야'하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너를 알아보는 이를 알아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 마리아는 이름을 불리자 자신의 창조주를 알아보고 곧바로 그분을 '랍비' 곧,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마리아가 외적으로 찾는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가르치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복음서 강해')
첫날에 하나님의 낙원에 있게 되는 것(눅23,43 참조)도 부활에 속하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들지 마라'고 말씀하신 때도 부활에 속하지만, 부활이 완성된 것은 그분께서 아버지께 가셨을때입니다. (오리게네스 '요한복음 주해')
그리슫께서 성육하신 목적은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잘 들으십시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나님이시며 너희의 하나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암브로시우스 '신앙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