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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설교 이야기

부활 후 세번째 주일 교부 주해 - 요한복음 21:1-19

<부활 후 세번째 주일 교부 주해 - 요한복음 21:1-19>

21, 1 - 19 :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9,62)고 쓰여 있는 것을 생각할때, 회개하기 전에 어부였던 베드로가 왜 다시 고기잡이로 돌아갔는지 의문을 가져볼 만합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복음서 강해')
아무 할 일이 없던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갔습니다. 그것도 밤에 갔습니다. 몹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누가도 제자들이 두려워한 사실을 기록하지만(눅24,37 참조) 그때는 이대와 다른 때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하나로 묶여있는데다가, 다른 이들이 고기잡이하는 것을 보며 일없는 시간을 잘 보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일하다 지쳤을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분은 그들과 대화를 먼저 나누려고 당신이 누구인지 곧바로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복음 강해')
'pedagogia'는 낱말 자체에서 드러나듯,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아이'의 뜻을 잘 생각해보고, 'pedagogos(교육자)'에게 그들을 맡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입니다. 성경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찬양하고 순박한 믿음의 다양한 양상을 여러가지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 제자들은 이 때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가 되어있던 이들을 '얘들아'라고 부르심으로써 ... 아이들이 지닌 순박함을 우리가 본받을 태도로 제시하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육자')
주님을 알아본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이번에도 서로 다른 성향대로 행동합니다. 한 사람은 열정적이고 한 사람은 관조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행동파인 반면 한 사람은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먼저 알아본 것은 요한이었지만 그 분께 먼저 달려간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요한 크리스소스토무스 '요한복음 강해')
우리 주님께서 음식을 드신 것은 당신 혀에 꿀맛 같은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을 보고서도 육체가 아니라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 감히 당신께 다가오려 하지않는 의심하는 사도들에게 확신을 주기위해 숯불에 구운 물고기를 나누어드셨습니다. (히에로니무스 '예루살렘의 요한 반박')
베드로는 다른 이들과 함께 그물을 끌어올려 그 안에 든 것을 그리스도께 바칩니다. '100'은 다른 민족들 전부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50'은 이스라엘에서 선택된,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3'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계시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합니다 그물에 걸린 믿는 이들의 삶은 이 삼위일체의 영광과 마땅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암모니우스 '요한복음 단편')
율법을 나타내는 수 10(십계명)에 성령을 나타내는 수 7(사11,2-3)을 더하면 17이 됩니다. 1부터 17까지의 연속되는 숫자를 모두 더하면 153이 됩니다. ... 그러므로 그런 은총을 나누는 모든 사람이 이 수로 상징되며, 이 수는 그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수는 삼위일체의 신비와 관련하여 50과 3을 포함해 삼중의 의미를 지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린 이가 왜 베드로였을까요? 우리의 거룩한 교회가 그에게 맡겨졌기 때문입니다(마16,18 참조).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21,16)' 이 말씀을 들은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복음서 강해')
17에 3을 곱하면 51이 됩니다. ... 50번째 해는 모든 사람이 일을 쉬는 휴식의 해입니다. 일치 안에서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는 참된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이 달라진 것을 보고 경외심에 가득 찬 그들은 매우 놀라며 그 까닭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데다 그분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분임을 알았기에 묻는 것을 삼가고, 그분께서 예전보다 더 강력한 권능을 행사하시어 그들을 위해 만드신 것을 먹기만 했습니다. 그분께서 이때는 하늘을 바라보지도 않으시고 예전에 하셨던 인간적 행동들을 하지도 않으심으로서, 과거에 당신께서 하신 일들은 우리의 수준에 맞추신 것이을 알려주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복음 강해')
신비적 의미로 풀면, 구운 생선은 고통받으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또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6,41)'이십니다. 교회는 영원한 복됨에 참여하고자 그분 육체와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희망을 품고 있으며 여기서 보면 교회를 나타내는 일곱 제자에 속하는 우리 모두는 이 위대한 성사에 참여하며 이 행복 안에 받아들여졌음을 나타내기 위해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예수님께서는 왜 다른 이들은 제쳐놓고 베드로에게 물으실까요? 그가 사도들 가운데에서 선택된 이며 제자들의 대변인이요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사도 바울이 조언을 구해야 할 일이 있었을때 다른 누구도 아닌 베드로를 찾아간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복음 강해')
당신 양 떼를 돌보도록 주님께 직접 선택받은 이는 베드로입니다. 그는 같은 말씀을 세 번 듣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 그리스도의 양 떼를 믿음의 음식으로 잘 돌봄으로서 그는 과거에 지은 죄를 씻었습니다. 이 과거의 잘못 때문에 그는 주님께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세 번 받습니다. 십자가 처형 전에 세 번 모른다고 한(마26,69-75 참조) 분을 세 번 고백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 '신앙론')
그 분은 베드로에게 그가 고백하는 사랑에 대해 물으셨고 그에게 당신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그리스도께 무슨 이익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이익이지 그리스도께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것도 여러분에 이익이지, 그리스도께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양들을 베드로에게 맡김으로서 그들을 매우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하나님께 서슴없이 나아가도록 하며 우리를 밝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이로 드러내 줄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높은 곳의 선의를 불러오는 것은 이웃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입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복음 강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지위를 높여주셨습니다. 당신 양 떼의 우두머리로 삼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이런 뜻입니다 '너는 나를 믿는 모든 이를 돌보아라. 그들은 가르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너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는 그들의 짐을 져주고, 나약한 그들을 보호하고 위로하며 네가 받은 은총으로 그들을 길러야 한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요한복음 주해')
'나의 양들을 돌보아라' 주님께서는 '너의' 양들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요. '착한 종아. 주인의 소인이 찍히 주님의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뜻입니다. 따져봅시다.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여러분이 베드로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받았습니까?(고전1,13 참조) 그분의 양들을 돌보고, 그분의 세례를 씻기고, 그분의 이름으로 인장을 받고, 그분의 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분은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주님의 수난으로 사도 베드로의 믿음이 흔들렸지만, 쓰디쓴 눈물 덕분에 그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위로의 말을 들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서간집')
베드로도 자신을 가다듬고 주님의 이 물음에 더 신중히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가까웠을때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큰 굳건함을 자신했던 일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존자 베다 '복음서 강해')
베드로는 자신감이 넘치던 옛날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을 나중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행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양이 아니라 당신의 양을, 베드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 돌보라고 맡기신 다음, 베드로가 지나치게 성급히 구는 탓에 처음엔 기회를 주지 않으셨던 순교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에 제자들을 부르실 때와는 다른 식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막1,17)'라고 하셨지만, 그때는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부르셨고 지금은 상을 차지하라고 부르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죽을 것이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고난당하는 이에게 영예이자 영광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하고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그분의 배려와 신중함 그리고 그분께서 베드로와 매우 친밀한 사이임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가 되었소?'하고 누가 묻는다면, 저는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이 교구의 주교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교사로 임명하셨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요한 크리스소토무스 '요한복음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