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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설교 이야기

성령강림 후 열 네 번째 주일, 교부 주해 - 누가복음 15:1-10

<성령강림 후 열 네 번째 주일, 교부 주해 - 누가복음 15:1-10>

15, 1-10 :
말해보시오 바리새인이여. 어째서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꾸짖으시기는커녕 그들에게 구원의 방편을 마련해주셨다는 이유로 투덜거리는 것입니까? 그분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비우고 우리처럼 되시어 인간의 남루함을 입으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누가복음 주해')
아버지와(눅15:11-12 참조) 목자와 여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입니다. 그대의 죄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는 그대를 메고 가십니다. 교회는 찾아나서고, 아버지는 받아들이십니다. 목자는 메고오고, 어머니는 찾고, 아버지는 옷을 입히십니다. 먼저 자비가 오고, 그 다음에는 중재가 이루어지고, 마지막에는 화해가 이룹니다. 셋이 각기 다른 것을 보완하지요. 구원자는 건져내시고, 교회는 중재하고, 창조주는 화해시키십니다. 성스런 행위의 자비로움은 똑같지만 은혜는 우리의 공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친 양은 목자에 의해 회복되고, 잃어버린 은전은 발견되고, 아들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온전히 회개하여 떠나갔던 길을 되밟아 아버지에게 돌아오지요(눅15:20-21 참조). (암브로시우스 '누가복음 해설')
주님의 비유에서는 크나큰 인내가 보입니다. 길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나서 결국 찾아내고야마는 목자의 인내이지요. 참을성이 없으면 양 한마리쯤 쉽게 포기했겠지만, 목자는 참고 견디며 끝까지 찾아다녔습니다. 그러고는 몹쓸 죄인을 인내심있게 참아주듯이 어깨에 메고 돌아오십니다. (테르툴리아누스 '인내론')
아담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된 양이 그리스도 어깨에 메인 것을 기뻐합시다. 그리스도의 양 어깨는 십자가의 두 팔입니다. 거기에 저는 제 죄를 얹었습니다. 그 고귀한 멍에를 멘 목 위에서 저는 쉬었습니다. 양은 겉모양은 달라오 모두 같습니다.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고전10,17)'이니까요. (암브로시우스 '누가복음 해설')
길 잃고 헤매지 않는 이들은 남겨두고, 착한 목자는 그대를 찾아나섭니다. 그대가 숙이고 들어오면 그는 등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친절하게 그대를 자기 어깨에 태우고는 잃었던 양을 찾았다며 기뻐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대가 방황을 그치고 돌아오기를 문간에 서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에게로 돌아가기만 하십시오. 그대가 아직 멀리 떨어져있을 때 아버지가 달려와 그대 목을 껴안을 것입니다. 회개로 깨끗해진 그대를 사랑으로 껴안아 줄 것입니다. (대 바실리우스 '서간집')
영혼의 값은 믿음입니다. 복음서의 부인은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찾은 잃어버린 은전은 믿음을 뜻합니다. 복음서는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었다고 말합니다. 부인은 잃었던 은전을 찾자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기뻐합니다. 믿음을 잃거나 믿음을 값으로 치르고 얻은 은총을 잃을 때, 영혼이 입는 상처는 매우 큽니다. 그대의 등불을 밝히십시오. '눈은 몸의 등불(마6:22)'이라고 하였거니와, 이는 영혼의 눈을 가리킵니다. 영의 기름으로 타오르는 등불을 밝히고 집 안을 샅샅이 비추십시오. 그대 영혼의 구원, 잃은 은전을 찾으십시오. 사람이 그것을 잃으면 큰 시련이요 그것을 찾으면 큰 기쁨입니다. (암브로시우스 '서간집')
두번째 비유는 잃어버리느 것을 은전 한 닢에 비유합니다. 숫자 일은 완전한 수이며 옹근 전체인 십의 한 부분입니다. 십이라는 수 또한 완전한 수며 한 단위를 마감하는 마지막 숫자이지요. 이 비유는 우리가 만유의 하나님의 모습을 입은 존재임을 잘 보여 줍니다. 그 은전은 아마 임금의 모습이 찍혀있는 데나리온이었을 것입니다. 타락하여 길을 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발견되어, 거룩한과 의로움을 입고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누가복음 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