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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설교 이야기

성령강림 후 스물두 번째 주일 교부 주해 - 마태복음 23:1-12

<성령강림 후 스물 두 번째 주일 교부 주해 - 마태복음 23:1-12>

23, 1 - 12 :
일반 신자들이 무엇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경우에는 쉽게 바로잡을 수 있지만, 성직자들은 잘못된 길에 빠지면 바로잡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있은 뒤 사도들과 사람들을 향하여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에 자리에 앉아있다(마23,2)'고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미완성 작품')
모세 율법의 뜻을 풀이해주는 자들로 자처하며 그것을 자랑삼는 이들이나 율법을 잘 알아 그 지식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율법의 글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을 율법학자들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더 휼륭하다고 생각하여 남을 차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나누다, 이탈하다'라는 뜻의 '바리새인'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파레스(phares)'라는 단어는 '분열'로 번역되기 때문입니다). (오리게네스 '마태복음 주해')
자리가 사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제가 자리를 만듭니다. 장소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장소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제가 다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거룩한 이는 모두 사제입니다. 자리에 앉아 훌륭히 처신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영예를 받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미완성 작품')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제의 지체와 명성이 있으므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사제의 행실이 아니라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들의 말을 따르라고 권고하십니다. (히에로니무스 '마태복음 주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격없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도 그런 식으로 성직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들은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일들을 이야기하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람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고는 그들을 돕고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자로 불릴 것이다(마5,19)'라는 구원자의 말씀은 이런 이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하며 혼란에 빠진 자들을 제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자애로운 짐을 얹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을 북돋우기 위해 스스로 가장 먼저 무거운 짐을 집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을 두고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5,19)'라고 하십니다. (오리게네스 '마태복음 주해')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이중의 사악함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이 지도하는 이들을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고 극도로 엄격한 삶의 규율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에게는 그다지 엄격하게 굴지 않습니다. 이는 참되고 선한 목자가 지켜야 할 자세와 정반대됩니다. 선한 목자는 자신과 관련한 일에서는 엄격하고 준엄한 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도하는 사람들의 문제에서는 온화하고 관용을 베풀 자세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실천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경험해 본적도 없으면서 용서하는 마음없이 참아주는데 인색하며 말로만 자제를 행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하셨던 꾸지람을 한층 더 매섭게 또다시 하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태복음 강해')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은 이 의무들을 웬만큼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온 힘을 다하기는커녕 손가락을 드는 정도의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한테는 정의를 행하라고 지시하지만, 자신들은 눈가림으로만 행하는 사제들은 남들 눈에는 의로운 교사들로 보일망정 분명 그 행동에서 의롭지 않습니다.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사람들, 가르치기는 하면서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이들은 눈 앞의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벌을 내리면서 미래에 있을 벌은 무시합니다. ('마태복음 미완성 작품')
앞서의 꾸지람은 그들의 가혹함과 게으름의 표시와 관계되지만 지금의 꾸지람은 영광에 대한 광적인 욕망과 관계됩니다. 이 욕망은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꾸며대게 만들고 그들을 타락으로 이끌었습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 마음에 드는 것이 사제의 특별한 관심사가 되면,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건 그것을 보여줍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태복음 강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드른, 성구갑(경문)은 그것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에게 요새나 방어물 같은 것이라면서, 성구갑을 십계명의 '작은 그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지식에 요새나 방어물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지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자녀와 보물함과 곡식창고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없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마태복음 주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꼐만 보이기 위해 행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가르침을 묵상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영혼의 눈으로 볼때 옳은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그들이 본받던 예수님의 덕이었습니다. (오리게네스 '마태복음 주해')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도 스승님이나 아버지로 불려서는 안됩니다. 그분만이 아버지이십니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스승님이십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히에로니무스 '마태복음 주해')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이런 것을 좋아하는 행태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도, 잔칫상만이 아니라 교회의 앞자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리게네스 '마태복음 주해')
예수님께서 듣는 이의 주의를 어떻게 정반대로 돌려놓으시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은 윗자리에 마음을 두는 것을 금하실 뿐 아니라 끝자리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네가 바라는 것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첫째가 되고 싶은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만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태복음 강해')
새로운 신앙을 가르치게 된 사람 대부분이 자만과 오만에서 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가르침의 가치에 대해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주님꼐서는 그런 마음과 태도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이라 단언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영광을 좋아하고, 윗자리를 좋아한다'고 하십니다. 그분은 종이 되고자 하시며 겸손을 키우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마태복음 단편')